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조국의 앞날의 예견과 대안을 제시했던 정치가이자 교육자이고 외교관이었던 우사김규식 그의 독립운동활동을 살펴봅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조국의 앞날의 예견과 대안을 제시했던 정치가이자 교육자이고 외교관이었습니다. 미국 유학을 통해 러시아와 한국문제에 대한 글을 기고했고 러일전쟁을 예견하고 귀국하여 교육과 인재양성에 힘썼습니다.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은 1881년 경상도 부산 동래에서 출생했습니다.
태어나기는 동래부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따라 본가인 강원도 홍천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민 씨 정권시절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의 아버지는 대일무역정책을 비판한 상소문을 보낸 이유로 유배를 당합니다.
그로 인해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4살이었던 우사김규식은 숙부들의 집으로 맡겨졌으나 친척들도 형편이 안 좋아 어린 우사김규식은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했습니다.

 

선교사 언더우드와의 만남

어린 우사김규식은 돌봄을 받지 못하게 되고 선교사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보내지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너무 어렸던 우사김규식을 돌볼 수 없었던 언더우드는 그를 다시 친척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여전히 가난했던 친척들은 어린 우사김규식을 돌볼 형편이 못되어우사 우사김규식은 영양실조와 잔병치레를 하면서 심한 고열에 방치되게 됩니다.
어린 우사김규식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선교사 언더우드는 우사김규식을 다시 데려오고 지극한 정성으로 돌봐 건강을 회복하게 했습니다.
이후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은 선교사 언더우드의 학당에서 우사김규식은 영어를 비롯해 기독교등 신교육을 받게 됩니다.
언더우드 학당을 끝마치고 한성의 관립영어학교에 1기로 입학하여 독서와 사색을 즐기는 청년으로 성장합니다.

 

합리적이고 냉철한 소년기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은 아버지를 찾겠다며 선교사 언더우드 몰래 경성으로 가출을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신자들에 의해 잡혀 다시 언더우드에게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를 만났지만 할머니와 아버지를 이어 할아버지와 큰형이 세상을 떠났고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은 진짜 고아가 됩니다.
계속되는 불우한 환경과 비극적인 사건들이 계속되고 그를 향한 무정한 어른들과 동네 사람들의 무시와 차별은 성인이 된 후에도 다정한 사람과는 거리가 먼 냉정하고 찬바람이 부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불우한 청소년기 때문에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은 외교활동, 정치활동,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한쪽 파벌이나 계파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성격은 좌우합작에 도움이 되는 배경이 됩니다.
비록 고아로 자랐지만 주변의 차별과 냉담함을 극복하고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 미국으로 유학길을 떠나다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은 서재필의 독립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게 됩니다.
당시 서재필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서구의 문물을 배울 수 있는 미국 유학을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은 언더우드의 지원을 받아 미국 유학길을 떠납니다.
미국에서 재학시절 고종의 서자인 의친왕과 교우관계를 갖습니다.
데모스테니언 문학회라는 문학동아리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면서 대학교 잡지에 한국어로 논문을 싣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와 한국문제’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한국 정부의 무능함과 정치가들의 반역과 음모들에 대한 비판을 하며 지금이라도 한국은 각성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은 언어 능력이 뛰어나 영어를 비롯한 프랑스, 라틴어등을 익혔으며 웅변동아리 활동을 하며 연설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최고상을 수상 받기도 합니다.
졸업 당시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은 러일전쟁을 예견했고 일본이 승리하는 것까지 예언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졸업을 하고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장학금을 제시받았으나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거절하고 귀국을 합니다.

 

교육과 인재양성

귀국 후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이사가 되며 YMCA학교에서 이사와 서기를 거쳐 교사가 됩니다.
이후 YMCA학교에서 교육자로 활동하면서 언더우드의 비서로 활동을 합니다.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은 영어와 수사학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체조와 스포츠도 가르쳤습니다.
대한유학생회의 초청되어 강연을 하였고 한국문법이란 책을 썼으며 경신학교 교감으로 선임됩니다.
그리고 여전히 로노크 대학 잡지에 논문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1910년에는 숭실중학교 교사로 출강을 하기도 했습니다.
강의도중에는 가끔 영어로 된 시를 읊어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종교활동도 이어가며 한민족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 중국 망명하다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 그는 일본의 기독교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인삼장사를 한다며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중국으로 망명한 후 군사훈련을 받고 싶어 하는 윤치왕을 영국으로 보내주었고 여운형과 신규식 등에 의해 창설된 동제사에서 임원으로 선임되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학에 진학한 후 목회자가 될 거라는 소문을 내면서 상해, 난징, 베이징등에서 여러 애국지사들 접촉하고 중국의 혁명지도자들과 교분을 쌓았습니다.
또한 혁명파의 제2혁명에도 참여하였으나 중국혁명이 실패하자 다시 상해로 되돌아옵니다.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 몽골에서의 무역활동

몽골지방에서 무역상을 하는데 당시 동제사에 가입하면서 홍명희, 서병호, 신채호등과 교류합니다.
변복을 하고 독립자금의 모금활동을 하였습니다.
상업과 노동을 통해 비용을 마련해 군사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지만 부족한 자금과 이태준이 병으로 사망하여 항일군대를 만들기는 실패하고 맙니다.
이후 장사를 하며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지만 그만두고 허베이성으로 넘어가 기독교와 성경을 팔다가 상해로 돌아가 기계장사를 하게 됩니다.
이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건너가 앤더스&마이어회사에서 지점장으로 부임하여 활동을 합니다.
어학에 대한 뛰어난 재능으로 다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한자를 잘 구사하여 방언이 많은 중국 내에서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신한청년당 창립

서병호와 여운형 등의 초청으로 중국 상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을 창립합니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8월에 중화민국 상해에서 동제사 단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의 독립단체입니다.
한국 최초의 근대 정당이기도 합니다.
당수는 여운형이었으며, 당원으로는 조동호, 선우혁, 김철, 장덕수, 한진교, 서병호, 신규식, 이광수, 김구 등이 관여하였습니다.
한국의 청년들에게는 프랑스, 영국, 미국등으로 유학을 갈 것을 추천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세계 제1차 대전이 종결되자 파리 평화회의의 개최가 결정되고 미국의 휠슨 대통령이 제기한 민족자결주의에 전 세계 독립운동가들이 고무되고 신한청년당은 독립청원서를 윌슨대통령에게 보냅니다.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 프랑스 파리평화회의 참가

신한청년당 수석 대표로 임명된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은 프랑스로 파견을 갑니다.
프랑스로 떠나는 우사김규식을 위해 신한청년당원들은 십시일반 모아 결혼반지까지 팔아 여비를 마련해 줍니다.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의 출국에 맞춰 국내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나며 길림에서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일본에서는 2.8 독립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의 대외 활동은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대대적인 시위로 한민족의 독립의지와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려 조선의 상황에 관심을 끄는데 도움을 줬습니다.
또한 신한청년당원들은 조만식, 함태영등의 민족지도자를 만났고 우사김규식의 부인인 김순애는 국내에서 애국부인회를 결성했습니다.
파리에 도착한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은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탄원서 제출과 함께 ‘한국의 독립과 평화’, ‘한국 민족의 주장’ 등의 인쇄물을 만들어 세계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만행과 한민족의 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외교부는 우사김규식 일행의 회의 참석을 거부하였습니다.

 

파리위원회 설치

신한청년당은 파리의 사정을 알게되어 임시정부 설립을 추진합니다.
프랑스 파리내에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사무실을 개설하고 유학 중인 조선의 청년들이 조선의 현실을 알리는데 앞장섰습니다.
이후 한인들을 중심으로 비 공식 외교활동을 추진하게 됩니다.

 

임시정부 수석대표로써의 활동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은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정부 외교대표와 전권대사의 자격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후 외교문서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프랑스 외무성에 보냈고, 평화회의의 의장인 당시 프랑스 총리인 클레망스에게도 보냅니다.
세계 각국 대표들에게도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는 내용과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문서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보냅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공작과 프랑스 외교부의 거부권으로 인해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 일행의 파리평화회담 참가는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 미국에서의 구미위원부 활동

구미위원부 위원장이 된 독립운동가 우사김규식은 ‘극동 정세’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일본의 팽창이 영국과 미국에 무력으로 대항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국내외 언론에 기고하였습니다.
이승만과 함께 독립공채표를 만들어 기금을 조성해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의 정치가들과 교류하며 한국의 독립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체류 중 계속되는 두통으로 뇌종양 수술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간질이 생겨 고통을 받았습니다.

 

구미위원부

구미위원부의 공식 명칭은 구미주차한국위원회입니다.
1919년 5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인 이승만은 워싱턴에 집정관총재사무소를 설치하여 대미외교의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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