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고영근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고영근 그는 1853년에 태어나 1923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대한제국 시절 개화파 정치인이자 군인이었습니다.
여기서 개화파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이 근대화를 추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독립운동가 고영근은 함경도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와 광산을 관리하는 매광감리 등의 매우 중요한 관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 고영근의 행적 중 역사적으로 돋보이는 부분은 일본으로 건너가 명성황후 암살 사건에 가담했던 조선인 출신인 우범선을 암살한 것입니다.
명성황후 암살 사건은 그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의 황후가 일본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국민으로 하여 큰 분노와 슬픔을 안겼습니다.
이러한 분노와 슬픔으로 독립운동가 고영근은 우범선을 찾아가 암살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현재 독립운동가 고영근의 묘소는 관리가 되지 않은 채 경기도 수원에 위치해 있습니다.
을미사변
1895년 조선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사건의 배경에는 조선을 본인들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한 일본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은 내부적으로 반일 세력과 친일 세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하여 친일 세력들 즉 친일파의 주요 인사들은 일본과 손을 잡고 조선의 경제와 정치 등 조선 전반을 자신들의 이익 위해 조정하려고 하였습니다.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알려졌던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일본은 계획하게 됩니다.
특히 명성황후는 일본의 영향력 행사를 가장 반대하는 인사중 한명이었으며, 러시아와 함께 일본의 이러한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된 일본은 조선 내부의 친일파와 협력하여 명성황후가 거주하고 있는 경복궁에 침입하기에 이르었습니다.
침임후 명성황후를 암살하는 끔찍한 계획을 세웠으며 , 실제로 이 계획은 성공하였습니다.
침입자들은 미리 협조가 되어 있었던 친일파의 세력들과 함께 시해한 명성황후의 시신을 소각하여 증거를 없애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명성황후의 암살은 일본이 조선을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지배하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훗날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일본 정부의 고위 인사들도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가 되어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조선인들의 사이에서는 일본에 대한 반감을 크게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조선의 저항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으며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스스로 표출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개화사상가 독립운동가 고영근
독립운동가 고영근은 무관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개화 사상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개화사상이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한국에 유행한 사상입니다.
이는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생각과 행동을 말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고영근과 같은 사람들은 조선 사회의 발전과 개혁을 위해 여러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서재필, 윤치호, 유길준 등 당시 유명한 개화 사상가들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한국의 근대화 추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이들과 함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주최한 대규모 집회로서 일반 시민들도 함께 참여하여 자유와 권리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1896년에 설립된 단체이며 대한제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활동했습니다.
독립운동가 고영근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확대하고자 하는 운동인 민권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계몽 강연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전파하고 사회의 발전과 개혁을 촉진하기 위한 주된 목적의 강연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수많은 개화사상들과 교류를 했으며, 독립운동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 윤치호는 고영근과 매우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 고영근, 우범선 암살
이 사건은 독립운동가 고영근이 일본으로 건너 갔을 때 일본에 망명한 조선인 윤효정을 만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윤호정과 만나면서 명성황후 암사 사건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우범선이라는 자는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데 동참했던 인물로 당시 조선훈련대의 제 2대대장이있으며, 사건 이후 일본으로 망명을 하였습니다.
고영근 그는 1903년 일본 히로시마 구레에 있던 자신의 자택에서 우범선을 초대하여 그를 직접 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살해 행위는 명성황후 암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살해한 직후 그는 인근 경찰서에 직접 자수를 하였으며, 일본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 받게 됩니다.
그러나 대한제국 고종의 선처로 사형선고에서 8년 복역으로 형이 감형되어 1911년 출소를 하게 됩니다.
우범선 암살 사건에 대한 여러 논란과 의혹은 현재도 제기 되고 있습니다. 그 중 윤호정이 본 사건을 단독 배후로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조종했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의 절친인 윤치호와 민영기 등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고영근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관직을 사퇴한 뒤에는 줄곧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는 1923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러한 고영근의 삶과 행동은 시대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본인의 신념을 지키려한 진정한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의 우리에게도 나라 사랑과 희생정신에 대해 큰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