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손병희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손병희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손병희 그는 현재 충청북도의 청주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당시 지역의 세금을 징수하는 지방 하급관리였던 아버지의 서자로 태어 났습니다.
당시 형편이 좋지 못한 가난한 집안에서 서자로 태어나다보니 어린 시절을주변의 냉대속에 불우하게 보냈습니다.
성장하는 과정에 1882년에 조카 손천민의 추천으로 동학을 접하고 추후 천도교 지도자 되었습니다.

 

동학을 만나 천도교에 입도

손병희는 1882년 당시 조카 손천민이라는 인물의 권유로 새로운 사상이 동학을 접하게 됩니다.
이 동학사상은 하늘아래 사람은 어느 누구도 모두 평등함을 추구하는 사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 신분제도가 유지되고 있던 시절에서는 파격적인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신분제도가 엄격했고 신분제도 아래 평등의 개념은 무척 혁신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천도교에 입교한 후 3년 정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때 천도교의 교주인 최시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교주인 최시형은 독립운동가 손병희에게 특별하고 어려운 시험을 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손병희는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여 최시형의 마음을 얻어 그 이후에 최시형의 수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 손병희
독립운동가 손병희 그는 동학 제3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고,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근대화 운동을 하였다.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귀국 후 천도교를 개칭하고 일진회와 진보회를 결합하였다.3 .1 운동을 주도하였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동학농민운동

1894년 고종 31년에 한국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납니다.
당시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와 경제적으로 불평등과 외세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독립운동가 손병희 그는 북접에 속해 있었는데 남접의 지도자 전봉준과 손을 잡고 동학농민운동 활동을 하게 됩니다.
당시 관군과 일본군의 합세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지만, 결국 관군과 일본군의 무지막지한 폭력으로 제압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학 농민들은 불평등한 삶에 대한 평등을 추구하고자 하는 신념을 가지고 관군과 지속적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결국 강력한 관군과 일본군의 무력에 많은 동학 신도들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동학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손병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관서지방으로 피신하고 동학의 포교와 재건에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그의 활약으로 1897년 최시형 교주의 뒤를 이어 동학의 교주가 됩니다.
독립운동가 손병희가 제3대 교주가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당시 제2대 교주였던 최시형은 자수를 하게 되고 처형을 당하고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죄목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현혹시킨다 하여 혹세무민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손병희. 개화사상을 받아들이다

독립운동가 손병희는 동학운동의 지도자이자 천도교의 교주역할을 하면서 근대화 운동도 하게 됩니다.
독립협회의 인사와 개화파 사람들을 만나 소통을 하고 이들 중 일부는 동학교에 입교시키고도 하면서 개화사상을 받아들입니다.
서양의 근대적인 문명을 받아들이고 우리나라의 발전을 추진하는 개화사상을 접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근대화 발전에 비중 있는 영향을 주게 됩니다.

 

동학의 탑압과 망명

동학의 세가 점점 커지는 와중에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가 손병희를 동학으로 이끈 조카 손천민이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 후 독립운동가 손병희는 신변을 보호하고자 안경장사꾼으로 변장하고 중국으로 망명을 합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압박으로 중국에서의 망명이 거절당하게 되자 1901년 일본으로 망명을 합니다.
망명 이후 같은 처지인 망명자들과 소통과 교류를 하게 됩니다.
당시 중국의 상하이와 메이지유신을 거쳐 일본의 개혁되는 모습을 보면서 인재양성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 손병희는 우수한 청년들을 뽑아서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근대화와 나정개혁에 관련된 내용을 신문에 기고하기 시작합니다.
그 후 1904년 갑진개혁을 일으켜 진보회를 만들게 됩니다.
진보회의 구성원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개화복을 입고 개화운동을 전파하게 됩니다.

 

독립운동가 손병희

일본 망명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한 후 당시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어 동학을 천도교라 개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진회와 진보회를 결합하였으나 일진회의 수장인 이용구를 필두로 을사늑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친일행각을 하던 이들을 출교 시켰습니다.
이후 독립운동가 손병희는 교육사업과 출판사업을 하면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 됩니다.
동시에 3.1 운동을 이끄는 민족대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3.1 운동 당시에는 독립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의 낭독으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습니다.
3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병을 얻어 보석으로 감옥을 나온 후 상춘원에서 별세하게 됩니다.

 

기미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의 시작을 알린 독립 선언문입니다.
이 선언서를 통해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를 전 세계에 알렸으며, 한국의 독립의지를 표현한 중요한 문서입니다.
‘기미’는 음력으로 1919년을 뜻합니다.
이 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반대하는 대규모 비폭력 독립운동이 전국에서 전개되었습니다.

본 선언서에는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내용과 더불어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던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서울의 탑골공원에서 가장 먼저 낭독이 되었으며, 이후 전국적으로 전파되어 수많은 국민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선언문에는 총 33인의 국민 대표가 서명을 했습니다.
이들은 여러 사회적 계층과 지역, 성별로 구성된 인물들로 대한민국 독립의 열망을 대표하였습니다.

 

사후

독립운동가 손병희는 1962년에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추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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