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화림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이화림 일생 업적

독립온동가 이화림 그녀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화림은 1905년 평양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본래 이름은 이춘실이었습니다.
유아교육을 숭현소학교에서 배웠으면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에도 14세의 나이로 참여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 이화림의 오빠들은 항일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화림은 그런 오빠들을 도와 항일과 관련된 전단을 만드는 일을 도왔습니다.
그 이후 역사문학연구회라는 평양지방의 학생조직에 합류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서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오빠들은 만주로 건너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소식이 끊기게 됩니다.
그때 독립운동가 이화림은 청진의 지역에서 유아원에서 일하게 됩니다.
사회주의를 접하면서 조선공산당원이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화림
독립운동가 이화림. 1905년 평양출생 1990년 중국 대련 사망. 3.1 운동에 참여. 한인애국단, 조선의용군에 가입 부녀대장 역임,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위생소장 활동. 한국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인정 못받음. 중국은 화림문학상 등 그녀의 공적을 기림

 

한인애국단활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독립운동가 이화림 그녀는 25세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 활동을 합니다.
그곳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을 하게 됩니다.
당시 윤봉길과 이봉창 등과 함께 한인애국단이라는 조직에 일원이 되어 항일운동을 이어갑니다.
또한 당시 독립운동가 김구선생의 비서로써 동해라는 가명으로 일제의 밀정 즉 간첩을 찾는 활동을 합니다.
당시의 임시정부는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여성인 독립운동가 이화림은 당시 허드렛일과 시장에서 나물 등을 파는 일을 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 이화림은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의 조력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투척할 때에는 부부로 위장하여 함께 활동하였습니다.
비록 작전당일에는 일본어를 잘하지 못해 일제에 의해 발각될 위험이 있어 윤봉길의사만이 식장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일본으로 폭탄을 갖고 가는 이봉창에게 폭탄을 숨길 수 있는 특별한 주머니도 만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훙커우 공원의 폭탄 투척 사건 후, 한인애국단은 일제의 독립운동가 색출을 피해 흩어졌습니다.
이후 독립운동가 이화림은 공포주의만으로는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김구와의 정치적 의견이 다른 공산주의자로써 또 다른 독립운동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후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가 이화림에 대한 기록을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의용군과 독립운동가 이화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가흥 쪽으로 옮길 때 독립운동가 이화림은 그들과 동행하지 않고 광저우로 갑니다.
중산대학교 법학과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간호학과로 과를 변경합니다.
그곳에서 당시 유학온 학생 김창국과 결혼하여 아들인 김우성을 낳았습니다.
이후 의열단원이었던 윤세주의 무장투쟁에 대한 참여 권유의 연설을 듣고 남편과 의논한 후 난징으로 향합니다.
당시 난징에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에 당원으로 가입을 하고 부녀국소속 의료담당으로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 난진조선부녀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중일전쟁이 1937년에 발발하자 독립운동가 이화림은 충칭으로 건너가 조선의용대에 참여합니다.
계림으로 이동했을 에는 조선의용대 여자 복무단 부대장 역할을 하였고 1941년에는 뤄양의 선견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황하로 건너가 타이항산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 참여했으며 일 년 후에 화북조선인민간부훈련반에서 훈련교육을 받고 부녀대장으로 졸업을 합니다.
조선의용군 활동시절에도 식량부족이 심각했는데 독립운동가 이화림은 나물을 뜯으며 도라지 타령을 개사하여 부르며 지친 동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의 근거지가 일본군에 의해 발각되고 퇴각하는 과정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됩니다.
독립운동가 이화림은 간호학과 출신으로 부상자를 돌봤으며 이후 조선의용군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게 됩니다.
이렇게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도중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 이화림은 옌안의과대학에 입학하고 중국의 공산당에 가입을 하게 됩니다.
의과대학을 졸업을 하고 그녀는 하얼빈에서 의사가 됩니다.
그 후 한국전쟁에 발발하자 인민군 위생소장으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전쟁 중에 미군의 폭격 파편에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독립운동가 이화림은 중국으로 돌아가 심양의사학교의 부교장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중국 교통부 위생기숙부서의 높은 직위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때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고초를 견뎌야 했던 시련을 겪기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이화림은 멈추지 않고 사회적 활동을 했고 대련시의 조선족 노인 협의의 명예 회장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95세에 생을 마감하고 전 재산을 대련시 조선족 학교에 기부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독립운동가 이화림 사후

현재 독립운동가 이화림은 한국전쟁에서 공산당원으로 참여하였던 자라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연변작가협회에서는 독립운동가 이화림의 역사적, 문학적 기여를 기리는 의미에서 ‘화림문학상’을 만들어 수여하고 있습니다.
이 상으로 인해 대한민국에서도 독립운동가 이화림의 잊혀진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파묘’라는 영화에서 여주인공의 이름을 그녀와 이름과 같은 화림으로 하여 국내에서는 그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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