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상룡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이상룡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이상룡 그는 1858년에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명문가의 후손이자 정통 유학자로서 어려서부터 전문적인 학문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1896년 일제의 단발령 시행과 명성황후에 대한 시해에 항거하여 외숙부인 ‘권세연’이 의병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에 독립운동가 이상룡도 의병에 참전하게 됩니다.
이는 배운 것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은 이상룡은 척사유림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이후 그는 의병들의 수적 열세와 체계적인 훈련 부족, 일본군에 비교해 열악한 무기 등으로 인해 무력이 아닌 본인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구국운동으로 노선을 바꾸게 됩니다.

 

<명성황후 시해>

일본군은 조선땅에서 주도적으로 권리를 행사하려 하지만 여의치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일본군은 조선의 주재 공사를 미우라 고로 육군 장군으로 교체하게 됩니다.
공사로 임명된 미우라 고로 장군은 가장 먼저 대원군을 등에 업고 친일파 정권을 한데 모으기 위한 행동과 조선 궁궐 내에서 쿠데타를 계획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 중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본 사건은 조선 내부에서 친일파 정권을 부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첫 번째 달성 목표였습니다.
그 이유는 시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상황들이 조선 왕실로 하여금 공포심을 가지게 하여 고종으로 하여금 일제에 반하는 어떠한 언행도 할 수 없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것이 결론적으로 ‘명성황후 시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독립운동가 이상룡
독립운동가 이상룡 그는 1858년 안동에서 출생. 1896년 일제의 단발령, 명성황후 시해에 항거하여 의병에 참전. 이후 그는 의병들의 수적 열세와 체계적인 훈련 부족으로 인해 무력이 아닌 본인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구국운동으로 노선을 바꾸게 됩니다.

 

계몽주의자 독립운동가 이상룡

독립운동가 이상룡. 그는 주변에서 함께 하단 김동삼, 유인식 등과 함께 협동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이 학교에서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근대교육을 통한 훌륭한 인재양성에 학교 인원 모두가 집중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07년 이상룡은 계몽주의자로의 길을 걷고자 하게 됩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가 되었을 때 입니다.
명문가의 후손이자 안동의 전통적인 사회에서 그는 이미 주변인들에게 명망을 얻었으며, 지역에서는 입지를 굳힌 사람이었습니다.
50세라는 나이에 본인의 사상과 정신의 기준이 되는 자아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미에서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의 이러한 혁신적인 행보는 안동지방의 하나 된 특유의 친족 문화를 통해 안동지방 전체가 개화의 선두지역이 되는데 초석이 됩니다.

이러한 행보의 결실로 1908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라는 계몽단체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 당시 대한협회 안동지회에서는 화보를 발간하기도 했으며, 지역을 돌며 나라를 사랑하라는 주제로 강연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한협회 중앙본부가 친일적인 성향으로 퇴화되는 것을 보고 계몽주의자로서 강력하게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계몽을 통해 나라를 구하자는 협회의 근본적인 이유를 이상룡 본인 혼자라도 지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신민회라는 국대 최대 규모의 비밀결사 단체에서는 조국이 망해가는 모습을 한탄하며 기존의 독립운동의 방법이 아닌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해 숙고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는 계획을 추친하게 됩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러한 계획을 전해 듣고, 기존의 독립운동거점을 떠나 중국을 망명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 망명의 길에 고령의 이상룡 또한 고향인 안동을 떠나게 됩니다.
이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연로할 뿐만 아니라, 본인이 평생 살아온 고향 안동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신민회>

개신교의 지원을 받은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는 표면적으로는 신학문 교육, 학교 건립, 계몽 교육 등이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을 훈련할 신흥무관학교의 뿌리를 마련하는 게 이유였습니다.
신민회는 향후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설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독립운동가 이상룡. 신흥무관학교의 설립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해 간도로 이주한 이상룡과 이회영, 이시영 등은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로 벼농사를 보급하고 이주 기반을 자리 잡기 위한 이유로 경학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습니다.
경학사는 시간이 지난 뒤에는 한족회와 부민단으로 변모하였으며, 이는 간도에서 한인사회가 정착을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군사교육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만들어 문무를 겸비한 독립군 양성에 몰두하게 됩니다.
신흥강습소 또한 훗날 신흥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여 정예의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라는 조직을 별도로 구성하게 된 한족회는 독립운동가 이상룡을 필두로 무장항일투쟁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이러한 서로군정서는 많은 전투에서 일본을 격파하는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냅니다.

 

독립군을 통합하다.

이상룡 그는 계몽활동과 더불어 의병활동을 실시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습니다.
1920년대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모든 독립운동단체를 하나로 모으는데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1923년에는 독립운동단체들의 의견 조정과 단합을 위해 대표 4인을 각각 파견하여 조국의 독립에 힘썼습니다.
1928년에는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게 되었고 1932년 서거하게 됩니다.
그의 유해는 1990년 흑룡강성에서 유해를 봉환받아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현재는 국립 서울 현충원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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