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동휘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이동휘. 그는 1873년 함경남도 단천시에서 출생했습니다.
이동휘의 호는 성재, 본관은 하빈이며, 자유를 무척 사랑하는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기개와 무용일 갖춘 인물이었으며, 대성재에서 한학과 함께 예를 배우게 됩니다.
1919년에는 노인동맹단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체포되어 수난을 겪게 됩니다.
이때 자살을 시도했으나 생존하게 됩니다.
1890년에는 강정혜와 혼인을 하게 되었으며, 부모님의 추천으로 단천에서 공무를 보게 됩니다.
단천 군수의 생일 잔치에서 군수가 기생에게 추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에 격분하여 잔치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동휘. 군인이 되다.
이동휘는 1896년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1년 만에 졸업하여 육군 참위에 임명됩니다.
이후 그는 지방 부대의 재정을 검사하는 검사관으로 임명되어 공금 횡령 사건을 맡아 위법자들을 단호히 처벌하면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1903년에는 참령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강화도의 진위대장으로 임명됩니다.
그는 강화도에서 최선을 다해 근무를 하였고, 1904년 일본의 황무지 요구를 반대하기 위해 결성된 공진회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이후 이동휘는 윤철규를 체포하게 되었으나, 그의 모함으로 인해 본인을 포함한 부하들까지 군법원에 기소가 되게 됩니다.
재판을 통해 이동휘 본인은 풀려 났으나, 부하들은 처벌을 받게 됩니다.
윤철규 또한 풀려나 강화도로 돌아오자마자 주민들을 수탈하고 일본인들과 결탁하게 됩니다.
이에 이동휘 그는 강화도의 진위대장직을 스스로 사임하게 됩니다.
애국계몽운동
독립운동가 이동휘는 1903년에 합일학교를 설립, 1904년에는 보창학교를 설립하게 됩니다.
구국의 인재를 양성하고 두 학교를 모범적으로 발전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한글, 영어, 일본어 등을 비롯한 역사, 지리, 과학 등 다양한 교육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하루에 한 시간은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는 강화도를 비롯한 황해도, 충청북도, 함경남도, 개성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돌며 교육 계몽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리하여 강화도 일대에 70여 개 학교가, 전국적으로는 170여 개의 학교를 짓게 됩니다.
또한 그는 기독교가 서양 문물의 전달 매개체가 됨은 물론, 계몽 운동의 수단으로 인식하여 기독교를 통한 민족 계몽 운동에 주력하였습니다.
보창학교에 대하여
보창학교는 1905년에 설립된 사립학교이며, 독립운동가 이동휘가 교장을 맡아 근대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육영학교에서 시작하여 보창학교로 학교명을 개명하고, 각종 학과 개설과 함께 교원 양성에서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와 함께 군사훈련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보창학교의 교육 열정은 수 많은 애국지사들을 배출하여 그들에게 국권 회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간도
독립운동가 이동휘. 그는 1910년 8월에 배일론의 선두자이며 한일합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가 됩니다.
체포된 그는 한성으로 압송되어 총감부에 수감되게 됩니다.
얼마 후 풀려난 그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전도사로서 전국을 순회하기 시작합니다.
순회 도중 원산에 만난 영국인 선교사로부터 수당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원산의 교회에서 근무를 제의받았으나 사양하게 됩니다.
그는 간도로 이동하여 포교를 다시 시작하게 됐으나, 일본군은 이동휘 본인을 포함한 그를 추종하던 자들 모두 북간도 지역으로 망명을 시켜 버리게 됩니다.
독립운동가 이동휘. 공산주의자가 되다.
1917년 3월 만주 북쪽지역에서 숨어 생활하던 이동휘는 러시아의 혁명 소식을 접하자마자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촌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어 또다시 수감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의 혐의는 ‘독일 정탐’. ‘동중철도 파괴공작’ 을 주도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는 그를 석방하기 위한 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키게 됩니다.
독립운동가 이동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되다.
이동휘는 1919년 8월 중국 상해에 입성하여 초대 국무총리가 되어 임시정부 내의 같은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인사회당’을 재건했으며, 임시정부를 주도하는 정당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고려혁명위원회’로의 개편을 시도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동휘. 사망
1921년 5월 상해 공산당 사무소에서 고려공산당대표회의를 개최하게 됩니다.
고려공산당의 창당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조직을 꾸리게 됩니다.
그해 6월에는 상해를 떠나 인도양, 지중해, 독일을 지나 10월에 레닌그라드에 도착하게 됩니다.
고려공산당 대표단은 레닌을 포함한 지도자들을 만났으며, 자유시 참변을 포함한 불법적인 활동과 상황을 전했습니다.
국제공산당집행위원회는 고려공산당을 공식 인정하였으며, 군감옥에 갇혀 있던 고려공산당 장교와 병서 80여 명을 석방시키게 됩니다.
이후 1935년 이동휘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사망 소식은 국내에도 알려지긴 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추도회조차 열지 못하게 됩니다.
그의 유해는 그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관리가 되지 않아 현재는 그 위치조차 파악이 안 된다고 합니다.
2007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독립운동가 이동휘.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세워져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업적과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