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안중근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안중근, 그는 대한제국 말기시대의 인물로 계몽 운동가이면서 독립운동가입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났습니다.
계몽운동으로는 삼흥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통해 나라가 바로 서기를 바랐습니다.
의병활동으로는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습니다.
훗날에는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인들에게 한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무술이 뛰어난 명사수 독립운동가 안중근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지역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배와 가슴 쪽에 7개의 점을 가지고 태어나 북두칠성을 따 어릴 적 이름을 응칠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며 무술도 잘했습니다.
말타기와 사냥을 잘하여 주변에서는 명사수로 칭했습니다.
동학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부친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진압에 앞장서게 됩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종교는 천주교였으며 도마라는 세례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가톨릭 신앙을 가지면서 신학문을 접하게 되고 프랑스어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안중근 그의 가족은 애국심이 충만한 유교주의 집안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안중근은 시대가 직면했던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될 수 있었습니다.
계몽운동과 의병활동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신이 운영하고 있던 석탄 상점을 팔아서 그 돈으로 삼흥학교를 세웁니다.
그때가 1906년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교육활동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인재 양성을 하던 중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의병 활동을 하기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래서 1907년에는 연해주로 건너가서 의병 운동에 참가하게 됩니다.
11명의 동지들과 동의단지회를 구성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1909년 11명의 동지들과 동의단지회를 구성합니다.
이 단체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겠다며 각자의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합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이 동의단지회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 저격
독립운동가 안중근. 그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일본인으로 변장을 하여 하얼빈역에서 잠입합니다.
역 플랫폼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고 있는 당시 일본의 조선 총독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저격하여 사살했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바로 러시아의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 합병을 추진한 인물이었습니다.
수많은 한국의 국권을 침탈한민족의 원흉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함으로써 일본의 지배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표시였습니다.
이러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행동은 훗날 한국의 독립의지에 대한 강한 불씨를 남겨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토히로부미>
이토히로부미는 일본의 정치가였으며, 메이지 유신의 주요 인물 중 하나입니다.
일본의 초대 총리대신을 역임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서구의 경제, 법률, 행정체제를 연구하는 한편 이를 기반으로 일본을 개혁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대한제국의 침략 정책과 행동들로 인해 부정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토히로부미는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목표로 여러 차례 방문을 하였으며, 한국의 내정을 간섭하고, 한일 간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결국 1905년 그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내용이 담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함으로서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수감 중 동양 평화론 집필과 순국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현장에서 그 즉시 러시아의 경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 후 일본 경찰에게 넘겨져 지금의 중국인 뤼순형무소에 수감되게 됩니다.
수감생활을 하면서는 동양평화론을 집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10년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면서 1910년 3월 26일 형의 집행으로 순국하게 됩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순국은 훗날 한국의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하고 한국뿐만 아니라 식민지를 겪는 아시아 전역의 평화와 독립의 대표 상징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동양평화론을 내세운 독립운동가 안중근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아시아 국가 전체가 서로 간에 협력하여 제국주의 확대와 서구 열강들의 침탈에 맞서 번영과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사상을 내세웠습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일본에 대한 강력한 저항만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아시아 국가들이 당면한 서구 열강들의 침탈과 제국주의적 위협에 맞서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평화론자였습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 또 다른 시각
중국에서의 시각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 저격의 장소였던 중국에서도 동양 평화주의자로 중국 내에서도 혁명적 영웅으로 존경하고 인식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당시 중국의 근대 혁명가들과도 소통하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서양에서의 시각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재판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의 역사적 관점으로 근현대사의 이해를 돕는 학문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인권 단체와 서양 학자들 사이에서는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그의 비폭력적 이념과 동양 평화를 통해 평화와 인권의 측면에서 재평가하고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강력히 맞서는 아시아의 평화주의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