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신채호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신채호 그는 일제감점기 시대 독립운동가입니다.
민족주의의 사학자였고 계몽운동가였습니다.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호가 여러 개가 있었고, 지금은 단재 신채호 선생으로 더 기억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신채호. 출생과 성장과정
독립운동가 신채호 그는 1880년 충청도 대덕군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세조가 왕인 시절 재상을 지낸 신숙주의 18대 자손이었지만 집안이 일찍이 몰락하였습니다.
신죽주의 11대조부터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집안이 되었고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아버지 또한 관직을 하지 못하고 3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어린 나이 8살 때가 되던 해에 할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청원군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지냈습니다.
9살에 자치통감을 깨우치고 이어서 사서삼경까지 14살에 깨우쳐 신동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한학뿐만 아니라 한시와 삼국지연의 등을 즐겨 읽을 정도로 한문에 대한 실력도 높았습니다.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할아버지의 권유로 성균관에 입학을 하고 성균관 박사로 임명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16살에 결혼을 하게 되는데 혼인 후 태어난 아들이 죽게 되고 사실상 이혼을 하게 됩니다.
이후 형마저 27살 나이로 일찍이 사망하게 되어 조카딸을 친딸처럼 키웠지만 독립운동가 신채호와 조카 사이의 의견충돌이 생기면서 일제강점기 시대에 연락이 끊기게 됩니다.
<신숙주에 대하여>
신숙주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서 세종대왕과 세조대왕 시기에 활동한 학자이자 외교관입니다.
그는 문학적 재능은 물론 탁월한 외교 능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명나라와의 외교 사절로서 여러 번 중국을 방문했으며, 그 과정에서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의 문학적 지식과 외교 경험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가 남긴 글들은 지금까지도 한국 문학사에 소중한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신채호. 성균관박사 애국계몽운동
독립운동가 신채호 그는 할아버지의 권유 입학한 성균관대학에서 박사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박사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나라 사랑을 위한 계몽운동을 시작합니다.
황성신문에서 장지연의 조력으로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장지연은 을사늑약에 저항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장지연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황성신문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황성신문이 아예 폐간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언론계몽운동을 포기하지않고 박은식과 손을 잡게 됩니다.
그래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써 활동하게 됩니다.
1907년에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의 취지문을 작성하기도 합니다.
신민회는 당시 독립운동가 안창호가 주도하는 비밀 조직이었습니다.
신민회 활동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신간회, 대한독립청년단, 무정부동맹동방연맹의 조직 대표 활동
독립운동가 신채호 그는 중국으로 망명을 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했습니다.
무오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썼고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임시정부 수립을 위하며 상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한독립의 외교우선론을 주장하던 이승만 등 에게 반대하며 임시정부를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대한독립청년단을 북경에서 조직하고 단장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후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게 됩니다. 의열단의 정신을 문서로 기록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상해로 갑니다.
상해에서 폭탄 제조 시설을 둘러보고 약 한달간의 기간 동안 의열단의 선언을 집필합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혁명선언서입니다.
이후 중국에서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이필현과 함께 무정부동맹동방연맹을 조직하고 조선의 대표로 참여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신간회가 조직되는데 안재홍과 홍명희 등과 함께 신간회 활동도 같이 하게 됩니다.
이후 북경에서 일제의 관공서를 목표로 하는 폭탄제조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으나 1929년 조선총독부의 경찰에 의해 체포됩니다.
당시 치안 위반법 등에 의한 혐의로 10년형을 받게 되면서 중국 뤼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수감생활 중 건강이 매우 악화가 되고 독방생활을 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지게 됩니다.
그러나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고 쓰러진 4일 뒤 2월 21일 감옥 안에서 홀로 사망하게 됩니다.
건국공로 훈장 대통령장 추서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남은 가족들은 이승만을 매국노로 맹비난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에서는 신채호의 아들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폐지 등을 줍거나 부두의 일일노동자로 떠돌아 다니며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면서 신채호의 아들은 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독립운동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62년이 돼서야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게 됩니다.
그리고 2008년도에는 독립운동가 신채호와 같은 무국적이었던 독립운동가들도 ‘가족관계등록부’를 등재할 수 있도록 하는 관련 법을 개정하였습니다.
그 당시 독립운동가 신채호선생등의 약 60여 명의 독립운동유공자들이 관련 법에 의해 가족관계등록부 등재가 허가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신채호. 여담
독립운동가 신채호 그는 16살에 첫 번째 결혼을 하지만 이혼을 하고 북경에서 두 번째 배우자 박자혜씨와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 후 두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차남인 신수범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신수범은 거제도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 풀려나고 그의 다른 자녀들은 북한에 남겨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