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용환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김용환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김용환 그는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유명한 의성 김 씨 학봉종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퇴 이황의 수제자였던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며, 독립운동가 서산 김흥락의 손자였습니다.
독립운동가 김흥락은 을미사변 당시 전국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또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고, 그중 60여 명이 독립운동을 통해 훈장을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김용환은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어린 시절의 김용환은 일본군에 의해 가족들이 포박되고 집안이 약탈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그의 어린 마음속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독립운동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1908년에는 의병장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였습니다.
1911년에는 김상태 의병 부대에도 합류하여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3.1 운동 이후에는 만주로 망명을 시도하였지만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안동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1921년에는 만주 길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단체인 ‘의용단’에 합류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친일파들에게 사형선고장을 발부하는 등의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22년 다시 한번 일본 경찰에 체포가 되었고, 독립운동을 위한 여정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없던 그는 좌절감에 빠져 재산을 도박에 탕진하는 과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그의 삶 중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독립운동가 김용환
​김용환은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지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도박에 탕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 돈을 비밀리에 만주 독립군에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김용환은 1946년 세상을 떠났고,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습니다.

 

독립운동가 김용환 그의 도박활동과 진실

독립운동가 김용환 그는 도박에 빠진 것처럼 보여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도박판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으며, 도박으로 제법 큰돈을 걸고 베팅하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특히, 새벽에 큰돈을 걸고 마지막으로 베팅하는 것이 그의 주특기였다고 합니다.
만약에 돈을 땄다면 좋았겠지만, 돈을 잃었을 때는 ‘새벽 몽둥이야’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소리를 지른 후 그가 거느리고 있던 수하들이 도박장에 나타나 돈을 가져가며 도박장을 위협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도박습관으로 인해 그는 막대한 재산과 땅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안동 일대에 퍼져나가 사람들은 그를 도박꾼이며 파락호라고 여기었습니다.
여기서 파락호란 재산이나 권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이었으나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 먹는 난봉꾼을 뜻합니다.
심지어 윤학준 교수는 독립운동가 김용환을 조선의 3대 파락호 중 한 인물로 꼽기도 했습니다.
그의 문중 사람들과 가족들은 크게 실망하며 그가 집안을 망칠 것이라고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운동가 김용환의 행동에는 사람들이 몰랐던 이유가 숨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의 재산은 아무도 모르게 만주의 독립군에게 보내지고 있었습니다.
독립군에게 보내진 재산은 군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가 도박에 빠진 것처럼 보여 일본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재산의 행방을 숨기기 위한 위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던 중 일본 경찰은 그의 이러한 행동을 계속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만주 독립군의 군자금 일부가 독립운동가 김용환에게 나왔다는 결정적인 증언이 나오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는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이 되며, 형무소에 구금이 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광복 이후

독립운동가 김용환은 일본 경찰에 의해 여러 번 체포가 되었고, 결국 재산까지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을 변치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 대부분은 그의  이러한 헌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독립운동활동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으며,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 당연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1946년 그는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가 떠나기 전 독립군 동지였던 하중환이 만주에 독립자금을 보낸 사실을 얘기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답변하기를 선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며 끝을 맺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언행은 그가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에 대한 깊은 철학과 겸손한 태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후

독립운동가 김용환은 자산의 모든 삶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헌신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뒤 그의 독립군 동지였던 하중환의 제문 등을 통해 공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가 김용환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기도 했습니다.
이 훈장은 당시 그의 아들 김시인에 대신 받게 됩니다.

그의 딸 김후웅 여사는 아버지가 대한민국 훈장을 추서 받는 날에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존경을 담아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글을 지어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 글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함께 그가 겪었던 시련과 고난의 뜻을 이어받겠다는 딸의 다짐이 담겨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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