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상덕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김상덕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김상덕. 그는 1891년 12월 10일 출생하여  1956년 4월 28일에 세상을 떠난 인물입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며 광복 이후 정치인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의 호는 영주이며,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중책을 맡은 것에서부터 출발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그는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여려 결정에도 참여하였으며, 민족혁명당에서는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계획뿐만 아니라, 본인의 계획을 직접 실행에 옮겨 실천했음을 증명합니다.

광복 이후에도 대한민국을 위한 그의 활동들은 계속됩니다.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으로서 대한민국의 초석을 마련을 하는 자리에 참여하였습니다.
민족통일총본부에서는 총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남북통일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1949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즉 반민특위의 위원장 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친일 행위를 한 인물들을 조사하고 책임을 묻는 중요한 임무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 김상덕
독립운동가 김상덕 그는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일본 유학을 거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와 국회의원과 헌법기초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1950년 6.25 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피랍되어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1956년 사망했습니다.

 

독립운동가 김상덕의 생애

독립운동가 김상덕은 경상북도 고령군 저전동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농사를 짓는 평범한 가정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집안 환경이 어려웠지만,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습니다.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의 권유로 서당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한자와 고전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열아홉 살이 되던 해까지 꾸준히 학습을 했습니다.

그의 나의 스물한 살이 되던 1912년 그는 경상북도 고령군에 위치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러나, 1913년 이듬해 중퇴를 하게 됩니다.
학교를 그만둔 후 그는 1915년이 되던 해에 더 넓은 세상을 공부하고자 경성부인 지금의 서울로 상경하게 됩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경신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낮에는 목수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고, 밤에는 공부를 하며 자신의 지식을 넓혀 갔습니다.

그즈음 그에게는 삶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가 발생합니다.
열여섯 살이 되던 1917년에 부모님이 미리 정해준 ‘강태정’이라는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김상덕은 경신중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근대 신학문과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경신중학교에서 공부한 것을 토대로 일제에 반한 항일 의식과 민족의식을 키워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그의 삶의 중요한 변화와 학습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물과 학문을 공부하고,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독립운동가 김상덕

1917년 그는 학습의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그의 가정 형편은 유학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당시 알게 된 기독교 계통의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일본에 건너가 그는 가장 먼저 정칙영어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이후 일본의 명문대학인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을 어떻게 활동할지 함께 고민하고 노력했습니다.

1918년 일본의 물가가 크게 오르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김상덕은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고 학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으며, 1918년 1월 6일 도쿄에서 주최된 조선유학생학우회 웅변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대회는 단순한 웅변대회가 아닌 유학생들이 함께 모여 독립운동을 어떻게 전개할지 논의하는 자리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김상덕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으며 실행위원으로 발탁되어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 등 여러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게 됩니다.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김상덕

독립운동가 김상덕은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영 방식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현재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자는 창조파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현재의 임시정부를 유지하면서 내부적인 개혁을 하자는 개조파가 있었습니다.
김상덕 그는 개조파를 지지하였으며, 개조파의 선언서를 편집하는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924년 그는 상해청년동맹회를 결성했으며, 조직의 목표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독립운동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 힘을 함께 모으는 데 있었습니다.

1928년에는 시사연구회의 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같은 해 12월 지린에서는 혁신의회와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모든 활동은 민족유일당운동의 하나로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민족의 하나 된 모습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 단체 간의 의견 차이로 하나가 되지는 못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일제의 만주 침공으로 독립운동가 김상덕 본인은 1933년 중국의 본토로 돌아가게 됩니다.
1935년 난징에서는 조신민족혁명당이 창당되게 되었습니다. 당시 중앙집행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 당의 활동 목표는 한국의 독립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김상덕 그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다양한 조직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광복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11월 일제 강점기도 함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김상덕 그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염원하던 대한민국의 광복을 맞이하여 타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는 귀중한 순간이었습니다.
1946년 2월에 그는 비상국민회의의 대의원과 민족통일총본부의 총무부장을 함께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직책을 통하여 혼란스러웠던 그 당시의 정치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 사회의 안정과 민족의 진정한 통일과 안녕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948년 5월에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됩니다. 당선이 된 그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헌법 제정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특히, 같은 해 6월에는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헌법의 초석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49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즉 반민특위를 곽상훈, 이인 등과 구성하였으며,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반민특위는 일제 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한 인물들을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김상덕 그는 위 조직을 통해 우리 아픈 역사의 정의를 다시 세우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이 반발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됩니다.
김상덕 그는 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피랍이 되었으며, 1956년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하게 됩니다.
현재 그의 유해는 평양에 조성된 재북인사의 묘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의 공헌을 잊지 않은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그의 독립운동과 국가에 대한 헌신을 기리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김상덕 그의 삶 자체는 한국 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조국에 대한 그의 노력과 헌신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기억되고 있으며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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