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그녀는 1891년 6월 18일에 태어나서 1944년 3월 31일에 세상을 떠난 한국의 중요한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녀는 조국이 일제강점기 치하에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을 때 나라를 위해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김마리아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일제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러 활동을 조직하고 주도했습니다.
김마리아의 원래 이름은 김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김근포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본관은 광산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마리아와 독립운동가 김순애와 아주 가까운 친척이기도 했습니다.
학창시절 김마리아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1891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김윤방은 그 당시 지역 사회에서 존경받은 지주였으며, 기독교에 깊은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 신념을 계기로 김윤방은 고향 마을에 초등학교를 직접 세워 교육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김마리아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 김몽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게 됩니다.
부모를 잃은 김마리아는 숙부인 김필순, 김윤오 등의 보살핌에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가족은 민족의식이 강한 명문집안이었습니다.
그중 고모부 서병호와 그의 아들 서재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주요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김규식의 부인이었던 김순애는 앞서 언급한 대로 김마리아와 친척 관계였습니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이러한 가족 구성들로부터 강력한 민족 정신을 물려받게 됩니다.
김마리아의 숙부인 김필순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 핵심 인물들과 매우 가까운 사이었습니다.
이러한 숙부의 집에서 지내면서 현재의 정신여자고등학교인 연동여학교를 다녔으며, 그곳에서 민족정신을 키우게 됩니다.
어린 김마리아는 1910년에 연동여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1914년 그녀는 본인의 지식과 경험을 넓히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도쿄 여자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김마리아는 1919년 도쿄에서 유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 당시 일본에서 생활하는 한국 유학생들이 함께 모여 2월 8일에 독립선언을 하게 됩니다.
이를 ‘2.8 독립선언’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김마리아 또한 이 운동에 황애덕과 함께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됩니다.
곧이어 한국에서도 3월 1일에 대규모 독립운동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3.1 운동’입니다.
김마리아는 이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한국으로 미리 입국하여 황해도 지역에서 운동을 조직하고 참여했다가 체포가 되고 맙니다.
체포를 당한 그녀는 심한 고문을 받아 온몸에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평생을 건강 문제로 인해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1919년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그러나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건강 문제로 병보석으로 풀려나게 됩니다.
1920년에는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중국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상하이에서의 활동 이후에도 그녀는 난징의 진링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파크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석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또한 뉴욕에서는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며, 박인덕, 황애덕 등과 다시 만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됩니다.
그녀의 최후
그녀는 1933년에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여러 가지 제약에 마주하게 됩니다. 여전히 일제는 조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경찰들은 그녀를 지금의 서울인 경성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교사로서 신학 분야 외에는 수업을 할 수 없도록 엄격하게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도 그녀는 윌링건 신학교에서 본인의 믿음과 지식을 제자들과 나누며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문으로 인해 과거에 얻은 지병으로 인해 결국 쓰러지게 됩니다.
1944년 3월 13일 평양기독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본인의 유언에 따라서 시신을 화장하였으며 유해를 대동강에 뿌리게 했습니다.
사후
그녀의 업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 선언은 조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사건이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유명한 작가인 이광수는 ‘누이야’라는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로서 김마리아의 용기와 의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 예로 안창호는 김마리아 같은 여성 열 명만 더 있었다면 대한민국이 독립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습니다.
당시 김마리아를 조사한 일본 검사조차도 그녀의 강인한 의지에 감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습니다.
결국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공헌은 인정받게 되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를 받았습니다.
그녀를 기리기 위한 서울 보라매공원에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녀의 말을 기록한 어록비가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2019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구에 그녀의 흉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