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길선주 일생 업적
독립운동가 길선주 그는 1869년 3월 15일에 태어났으며, 1935년에 세상을 떠난 인물로 독립 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장로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교육가로 활동했으며, 독립 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영향력과 기여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1907년에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며, 특히, 한국 개신교에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새벽기도회를 정착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목회자로서 그의 활동은 대단했습니다.
40년 동안 목회 일을 하면서 총 2만여 번의 설교를 실시하였고, 연간 380만 명에게 복음을 전해 수만명의 개종자를 얻기까지 합니다.
전국 여러 곳에 60여 개의 교회를 설립하는 한편, 3천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독립운동가 길선주는 목회자로서의 영향력 또한 매우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평양에 있는 장대현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신앙 생활을 통해 구국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숭덕학교와 숭실학교 같은 여려 학교들을 설립하고 경영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성경 연구에 매진하여 관련된 여러 저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젊은날의 독립운동가 길선주
독립운동가 길선주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한학을 배우며 그림과 시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음악과 한의학에도 관심이 있던 그는 당시 관습에 따라 ‘신선행’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젊은 날 그는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살에 되던 해에는 관우를 모시고 있는 관성교에 들어 가기도 했습니다.
그 시기에 많은 힘을 길러 강해지기는 했으나, 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아픔을 계기로 차력술과 기를 배워 병을 치료하려고 시도했습니다.
25살 때에는 친구의 권유로 선도 수련을 하게 되었지만, 3년 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하산하게 됩니다.
기독교
하산 후, 길선주는 친구 김종섭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친구 김종섭은 한문으로 된 기독교 서적들을 길선주에게 전달했습니다.
서적들 중 ‘천로역정’이라는 서적에서 길선주는 깊은 감명을 받게 됩니다.
1897년에는 그레이엄 리 선교사로부터 사례를 받게 됩니다. 이때부터 공식적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교회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으며, 1901년에는 장대현 교회의 장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902년이 되었을 때 모펫 선교사로부터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전도 활동을 하라는 임무를 받게 됩니다.
길선주는 기독교에 입교하기 전에는 관우를 섬기는 무속인으로서 영적인 능력을 인정 받아 그를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평양대부흥운동
1900년대 초의 조선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전쟁과 조선 내부의 파벌간의 분쟁으로 인해 사회가 불안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즈음 조선에는 개신교가 전파되었으며, 이 종교 활동은 단순한 신앙생활을 넘어 초창기에는 정치적 갈등을 야기 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기독교 자체의 근본적인 신앙을 복원하고 교회를 부흥하는데 집중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디 선교사는 이러한 부흥운동의 선구자로서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1903년 원산지역에서 사경회를 개최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에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1907년 평양까지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평양의 수많은 교회들이 하디 선교사를 초청하여 사경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길선주는 장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실시하던 도중 공개적으로 회개를 하였고, 이 회개가 평양대부흥운동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길선주 장로의 공개 회개는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하는 계기를 만들어 냈으며, 결과적으로 세례를 받음은 물론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유교적 가치관으로 인해 당연하게 여겨졌던 노비의 소유, 흡연, 음주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대두 되기 시작되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 개신교의 특징인 새벽기도회와 통성기도라는 독특한 신앙생활문화를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 운동을 통해 길선주 장로는 전국을 순회하며 수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역사에 남을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훗날의 한국 기독교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목사님이 된 독립운동가 길선주
길선주는 1907년 조선예수장로회신학교의 첫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목사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목사들의 모임인 노회가 없었습니다.
결국 목사가 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목사 안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길선주는 해외의 장로교회 선교담당자들고 협의하여 조선에 노회를 직접 설립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는 같은 해 9월 17일 평양에 위치한 장대현교회에서 실시한 제 1회 독노회에서 결국 안수를 받게 되어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때 길선주와 함께 안수를 받은 졸업생은 총 7명이었습니다. 이들은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된 역사적 인물들입니다.
또한 길선주 목사는 당시 교회 내에 당연시 되었던 남녀 간의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교회예배당 내에 설치되어 있는 남녀구분 휘장을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음악인 아악을 교회 음악으로 도입하는 한편 교회의 행사나 명절 때 함께 연주를 했습니다.
교회음악대와 찬양단을 조직하여 교회의 선교 활동을 통해 문화 활동을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1910년에는 1백만 구령운동을 제창했습니다.
이유는 국권의 상실로 아픔을 겪고 있던 민족을 위로하고 희망을 가지게 하려는 순수한 의도였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길선주
그는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1897년 조선의 대표 독립운동가이자 개혁가였던 안창호가 평양에서 독립협회를 설립할 때부터 함께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독립협회는 그 당시 조선 사회의 근대화와 개혁을 목표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 도중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가 되어 체포를 당하게 됩니다.
위 사건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반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들이 대대적으로 체포가 된 사건입니다.
체포 당시 길선주 목사의 장남인 길진형도 신민회 소속으로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길진형은 결국 고문후유증으로 1917년 사망하게 됩니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운동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였던 길선주는 이 운동의 핵심 인물인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으로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실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당일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연루자로 체포되어 2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하게 됩니다.
1919년 당시 그는 이미 평균 연령인 40대보다 많은 51세가 되었고, 안구질환으로 인해 시력도 많이 안좋아진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그의 상황에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은 가슴속에서 날이 갈수록 뜨겁게 일어 났습니다.
결국 그는 수감된 민족대표 32인 중 그 혼자만 무죄 판결을 받게 되었으며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길선주. 사망
1935년 그는 평안남도 강서 지역에 위치한 교회에서 사경회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사경회는 기독교 입장에서는 영적인 각성을 통해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집회였습니다.
그러한 집회 도중 길선주는 뇌일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됩니다.
2009년 8월 15일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길선주에게 건국훈장인 독립장을 추서하게 됩니다.
이는 독립운동에 가장 큰 공로가 인정되는 인물에게 주어지는 훈장입니다.
그의 이러한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들의 헌신과 고난을 기리는 중요한 사례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